나의 본명은 장정동이며 법명은 비공(飛空). 법호는 모아(母我)이이다.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어린 시절 삼총사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바보처럼 친구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도맡아했다.
또래 친구들보다 훨씬 천진했고 착해서 아무런 사고나 방어도 하지 못하고 동네북처럼 취급받고 살았던 기억이 있다.
가령 친구들과 동전치기를 해서 본전과 이자를 달라하면 아무 조건 없이 그렇게 돈을 주기도 하고 그 중 대장역할을 했던 친구가 나를 가장 업신여겼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밀양인 고향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나는 이미 출가해서 안정된 상태였고 그 친구는 경찰이 되어 파출소소장이 되어 있었지만 그 친구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했던 아련한 추억 때문에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것 같다. 해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만 그 끝이 좋은가 보다. 그러나 나는 고향에서 친구들과의 소중한 추억이 가장 아름답게 남아 있을 뿐 그 누구를 미워해본 적도 미워할 필요도 없다.
운명적인 인연은 곧 찾아온다
나의 부친은 한학자로서 한의사였다.
엄격한 가정에서 성장하게 된 나는 홀아버지의 쩌렁쩌렁한 호령과 매우 보수적이셨던 부친의 교육법에 늘 주눅이 들어서 집에서나 밖에서나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말도 어눌했고 세상이 온통 무서움뿐이었다. 더 이상 견디질 못한 채 고등학교 2학년 되던 시절 가출을 하여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으로 스님과 딱 만났다.
“너 집에 가거라.”
“집에 안갑니다.”
“그럼 절에 가자.”
그렇게 천겁의 인연을 만나 세상공부도 하고 사람으로서 새로운 인격의 바탕이 되는 지식을 터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거처할 절에 도착하니 한 노인은 승복이 아닌 낡은 옷을 걸치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장작만 패고 있었다.
“ 제가 도와 드릴까요?”
멋쩍은 내가 말을 걸었다.
“니~놈 일이나 보거라.”
그 한마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절의 어른스님이었던 것이다.
어른 스님께 삼배의 절을 올리고 스님의 시봉(시중)을 들었는데 스님은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요구를 하거나 시키는 법이 없었다.
본인 스스로 손수 모든 것을 다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흐르자 스님은 망태기 하나 ‘휙’던져 주면서 “?다 따라 오니라” 망태기를 들고 스님을 따라가 절 뒷산 밀양의 표충사 천왕산에 올라 솔방울을 주었다.
그 때 폭포아래서 스님은 만난 지 딱 1년 만에 내게 생애 첫 질문을 하셨는데 신상에 대한 모든 질문들이었다.
“18년 동안 무얼 먹고 살았나?”
“밥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 밥맛은 알겠구나”
“네, 압니다.”
“그럼, 밥맛이 뭐꼬?”
“...... ” 순간 매일 먹었던 밥맛이 무엇인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스님이 소리치며 물었다.
“밥맛이 뭐꼬?”
“......
” “이놈아, 모르면서 안다고 하였느냐?”
스님은 1년 동안 그 어떤 직접적으로 교육을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과연 이놈이 어떤 그릇인가?’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인연이란 참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 찾아왔다.
스님과 3년의 세월이 흐렸고 내가 머물던 절을 지나던 어느 객스님이 말을 건넸다.
“행자님은 왜 여기서 썩고 있는지 모르겠군. 큰 절에 가면 배울 것도 공부할게 많은데 말이오
.” 나는 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여기서부터 8시간정도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어가면 통도사가 나옵니다.”
낮에 했던 객스님의 말만 듣고 밤이 깊어지자 떠날 채비를 했다.
등잔을 들고 도망을 쳐서 막 고개를 넘는데 스님의 목메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진아!, 동진아~~~”
그 당시 스님은 나를 동진이라고 불렀다.
‘붙잡으려면 좀 더 일찍 붙잡지 하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가슴에서 뜨겁게 울컥 이던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미 마음은 통도사를 향해 가던 길이였기에 돌아설 수가 없었다.
통도사에서 1년의 세월이 지나고 또 다시 통도사를 나왔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20대 청년이 되었다.
비움의 美學/ 색즉시공 공즉시색
대구에서 ‘죽농 서동균’ 스승님과 ‘해정 홍순록’ 스승님의 문화생이 되어서 4~5년 그림 수학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문인화, 진경산수, 실경산수(보고 그리는 것) 즉 한국화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렇게 옥포에서 대구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림공부에 몰두하면서 수행을 하였다. 드디어 1980년 3월 첫 개인전을 하면서 화가로서 세상에 알렸다.
그 이후로 개인전18회 작가교류전22회, 지구촌 살리기 환경 포퍼먼스, 환경 설치 미술전 20여회를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소장 처는 예술의 전당, 서울지방검찰청서부지검, 국회의사당, 목아 박물관, 중앙승가 대학 등에서 내 작품의 소장 가치는 표현할 수 없지만 개인보다는 이처럼 주로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설치되어 있다.
필자가 본 비공스님의 그림은 워낙이 에너지로 발산하여 추상적인 언어라서 힘이 있고 그림 전체에서 넘치기는 세찬 에너지는 기업에서는 소장하기에 너무 적합한 그림이라 생각이 되었다.
인간과의 관계, 세상과의 인연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림을 시작하였고 구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터득한 것은 결국 인생 공부로 삶의 목적의 화두가 되었다.
그림에서 발견한 인생 구도자로 현대미술까지 정복하게 되었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쓰는 자의 몫이다.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선생은”은 비공스님의 최근 작업을 “문인화의 추상적인 해석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형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순수추상이다. 붓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활달하고 호쾌한 이미지의 선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에서 문인화적 요소가 담겨있다. 창작이란 미답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기에 어느 하나의 양식이나 형식에 갇히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라며 작품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또한 비봉스님의 “최근 작업은 이와 같은 시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여러 가지 물감을 겹쳐 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두텁고 복잡한 그림의 피부를 걷어냄으로 맑은 정신의 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치열함이 느껴진다. 열정과 표현욕구의 처절한 작업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은 눈이 맑아지는 듯싶은 정화된 의식, 감정을 유인하는 작품의 맑음 속에 있다.”고 추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선미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현재는 스님은 홍천 금학산 자락의 목우선원에 작업의 공간을 두고 사람과 세상과 소통의 통로가 되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생존과 존재의 답은 이렇다
불제자로서 인생철학은 분명하게 인생을 크게 두 가지의 물음으로 성장기를 겪었다
“하나는 생존이요. 또 하나는 존재의 물음이다.”
생존은 세속적인 경쟁의 구도로 이해한다면 존재는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일, 즉 인문학을 말한다. 삶은 인생철학을 근간으로 생존하기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생존하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바로 비움의 미학이다. 이 비움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무소유가 바로 행복의 척도가 아닌가 싶다.
빈 항아리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고 비워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일반적 사고로 비어있다는 것은 내면을 비워두는 것이다. 하여, 공은 존재하는 공이 아니라 없는 공을 생각한다.
무상, 없다는 것. 염세주의로 보면 그것은 죽음의 끝이다. 아무 기가 살아있지 않는 공. 즉 텅 빈 충만함이 없는 공이다. 다시 말해서 진공을 말한다.
비어있지만 에너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눈(시각적)으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미학으로 풀어낸 작업에서 비움의 미학이다. 즉 의도적으로 생각해서 사고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에너지로 뿜어져내는 에너지로 채워진 그림이기에 깊은 사고의 시기는 이미 뛰어 넘은 사고의 끝에 표현하고자 하는 에너지의 미학으로 생명의 에너지를 비움의 미학으로 표현했다.
이는 우주의 에너지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다. 이러한 에너지의 미학은 비움의 미학에 도달하였다. 물감의 모든 색은 살아있는 강렬한 생물체이기에 생명의 에너지를 비움의 미학으로 화폭에 담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공존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다.
물감이 생명체가 아니란 생각은 아주 어리석다. 색은 생명체를 다루는 아주 소중한 작업 중의 하나이다.
미래의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바로 예술이다
서구는 유럽사회는 문화예술이 국가의 경쟁력이고 국가정책의 비전이라고 하는 것이 서구의 정책이고 그들의 삶이다.
우리나라도 경제 발전은 급속하게 발전하였으나 사람들의 정서는 메말라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정서지수는 매우 위험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이런 과격한 정서가 참으로 걱정이 된다. 이는 물질문명의 발전과 이기적인 삶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며 도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학력의 시대가 만든 인간들의 작품으로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감성이 메말랐다.
이것이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 위기이겠는가?
삶의 정서가 가난한 경제의 위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정서에 자극을 주고 일깨워주는 선구자적인 예술가들도 예술의 혼을 가진 사람도 메말라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
고독한 길은 선구자적 길을 가는 것이다.
“사공뭉치는 말 안 듣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思考를 잘 치면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으로 세상의 무기가 되는 리더자가 된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즉 세상의 본보기가 되기도 하고 사고를 잘 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종이나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심심한 것은 외로운 것이지만 길을 닦는 사람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 고독한 것이다. 창작의 세계는 바로 그런 고독의 길인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육체를 지탱하는 3대 영양소는 지방, 탄수화물, 단백질이라고 한다면 정신에 필요한 3대 영양소는
“맛있게 살자!
멋있게 살자!
재미있게 살자! ” 로 명료하게 말하고 싶다.
3박자가 ‘딱! 딱!’ 맞아 떨어졌을 때 신나는 삶이지 않겠는가?
비공스님은 68년 밀양 표충사 출가, 법주사 승가대학 졸업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청강하였고 선수행 15년으로 저서 -선시집 <마음자리 행복자리>가 있다.
비공스님과의 인터뷰 내내 마음의 평화와 정서적 교감으로 수행의 길과 예술세계로의 여행을 맘껏 즐길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음자리 행복자리’ 내용에서 “말없는 말은 듣지 않아도 들린다” 그 짧은 예술가인 화가스님과의 만남에서 말없는 그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착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