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선교·봉사로 한평생 실천한 영원한 교육자인 강신경 원로목사
하나님의 정원사로 헌신한 강신경 목사는 열정적으로 살아 온 개척자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강신경 원로목사는 1929년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진지리에서 父親 강내석 長老와 母親 조기복 勸士의 슬하에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가정환경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기에 인자하신 부모님 품안에서 사랑과 온유 그리고 성김과 믿음 가운데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교회생활과 학업에만 전념을 하는 모범 학생으로 세상과 접하게 되었다.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은 축복이다. “주님께서는 내게 그 작은 씨앗을 뿌리도록 특권을 주셨다” 이제 그 씨앗의 큰 열매를 얻어 깊은 감사를 드리는 은혜를 입었다.
그 당시 일본의 포악한 수탈과 압박의 고통을 고향 사람들은 교회와 학교교육을 통해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교회와 교인들의 민족적 자각은 일제의 탄압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큰 인재를 배출할 수 있게 하였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순효’ 별명은 ‘감찰’로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강인한 기질과 해내고 마는 불가능이 없는 투지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의 커다란 신앙심은 진지동 교회에서 믿음의 씨앗을 키웠으며 한국 초대교회의 횃불과 같은 명신홍 목사님과 미국 선교사 닥터 킨슬러 목사님의 만남이었다. 또 하나의 추억을 말하자면 임재순 담임목사님이 “너는 하나님을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되거라.” 그 뜻을 담아 강순효(順孝)라는 이름에서 강신경(信經)으로 이름을 새로 지어 주셨다.
그 이름의 뜻에 따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제자로 살아온 일평생은 후회 없는 신앙이었고 교육자로써 그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 순종의 목회자 강신경 목사
1944년 평양상업학교를 마치고 조국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백 년 앞을 내다보는 이는 사람 나무를 심으라 하지 안 했던가 그래서 평양의 중등교원양성소에서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어서 서평양중학교 수학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기독교인이라는 신분이어서 일본인들의 핍박과 불이익의 요인이 되었고 그토록 소망했던 교직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194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과 함께 월남하게 되었다. 1951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그해 대학생 신분으로 대구 백학교회 전도사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신학생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심정으로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는 한마디로 북한에서 기독교 수난이 극도로 달했던 해였다. 1950년 12월 어느 날 기독 학도병들을 따라 남으로 내려와서 살 길이 막막할 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듯이 명신홍 목사님을 찾게 해 주셨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고 군목생활을 하면서 의정부 금오리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믿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지만 변변한 가구도 없이 개척한 교회는 아무것도 구비된 것이 없는 천막교회였다.
6,25 전쟁으로 거리에는 온통 전쟁으로 상처받은 거지와 부랑인 천지로 하루 한 끼의 밥을 얻기도 지친 아이들이 아무 데나 쓰러져 있었던 동두천의 아이들을 보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 아이들이 내가 맡아서 돌보아야 겠다“ 그 누구도 세상에 버려지고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지 안했으며 그들의 아버지가 되기로 작정했다.
1953년11월 사회복지법인 안흥보육원을 설립하고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예수님이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그래 “이 아이들이 자라서 무엇이 될 것인가. 이들을 가르쳐 자립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는 한, 성인이 돼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겠구나.”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군 부대가 떠나 오갈 데 없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즉각 응답해주셨고 그렇게 ‘안흥교회’와 ‘안흥보육원’이 설립되었다. 1989년까지 안흥보육원을 운영하였는데 보육원에서 기거하며 배출한 원아가 1천여 명이었으며 이후에 원생들의 감소로 패쇠하였다.
1956년도 사회복지법인 안흥모자원을 설립하였으며 그해 신흥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어려운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87년 신흥농축기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들에게 기술을 연마하여 사회인으로 잘 성장 할 수 있도록 교육사업과 목회 일에만 전념을 하였다.
1957년 사회복지법인 신흥간병요양원을 설립하여 어려운 환경에 있는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각박한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인들과 함께 구제와 선교 그리고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학교법인 신흥학원을 시작하여 10개가 넘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도 설립했다.
보육원에서 시작하여 중·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해 오는 동안 유아교육의 절심함이 신흥유치원을 설립하게 하였다. 이후 신흥대학의 부속기관으로 취학 전 어린이를 교육하고 연구하며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유아교육기관으로 정착하였다.
1960년 재단법인 신흥학원을 설립하였으며 신흥농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농촌지역에서 성장하는 젊은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며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우리는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961년 신흥중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963년 신흥상업고등학교(농업, 상업 포함)으로 개편하여 폭넓은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1967년 신흥여자중학교와 신흥여자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여성들에게도 교육혜택이 주어질 수 있도록 여성전문 중, 고등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도우심의 하나님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개척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깊고도 크신 사랑을 증거하고 싶었다.
전국 여러 곳에 학교를 설립하고 개척교회(파주시 소재 늘목교회(조영엽 전도사 파송)를 설립하여 교역자를 파송하는 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감사와 눈물로 간증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교회를 시작으로 대학에 이르기까지 영적 성장과 부흥으로 발전하였다.
작은 겨자씨가 무성한 초목과 거목을 이루듯, 신흥공민학교 자리에 신흥농축기술학교를 시작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핸 책과 함께 1인 1기 기슬교육으로 경제적 독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는 실용적인 교육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겨자씨의 교훈을 실천하다
군목으로 주어진 일과 보육원과 학교 일로 일에 파묻혀 살았던 5년간의 군목 생활을 마쳤다. 신흥여자, 중·고등학교는 이후에 보영여중, 보영여상으로 학교명이 바꾸었다. 이어 고양제일중학교 설립에 이어 고양외국어고등학교 설립으로 믿음으로 교육의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다. 1971년 신흥전문보건전문대학(1979년 개편인가)를 설립하여 국가적인 국민의 보건향상에 이바지 하고자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새롭게 일어선 신흥대학, 신흥인은 전문인으로서 지식과 기술을 갖춘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올바른 교육만이 국력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강목사는 전국 어디에도 교육의 불모지가 없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던 생각을 했다. 1978년 경북 김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이 지역에 대학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김천실업전문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그 후 교육의 불모지라 할 의정부와 김천에 ‘신한대학교’와 이어 ‘김천대학교’ 설립은 지역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오랜 갈망을 해결해준 것이다. 1979년 학교법인 순효학원을 설립하여 벽제중학교 설립과 함께 1988년 벽제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젊은 청년들에게 기술한국을 교육할 전문학교 설립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1994년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이라는 신도시에 공업기술 중심의 ‘신안산대학교’를 만들었다. 이듬해인 1995년 인디언 헤드 외국인학교를 설립하여 외국어, 특히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외국어 학교를 개교하였다. 2002년도 고양외국어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글로벌 시대에 발맞추어 갈 수 있는 전문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외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02년 한북대학교 설립인가와 함께 건축기공을 시작하였으며 21세기 신흥의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한북대학교’ 가 2003년 동두천시에 4년제 대학으로 개교하였으며, 2014년 03월 01일 신흥대학교와 한북대학교가 통합하여 ‘신한대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4년제 종합대학으로 개교한다.
젊은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현대화한 상아탑에서 전문적인 인재양성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핏 값으로 어린 생명부터 성인 그리고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르치고 섬기며 일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라고 하셨기에 지금도 순종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정원사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기쁨은 축복이다. “주님께서는 내게 그 작은 씨앗을 뿌리도록 특권을 주셨다.” 이제 그 씨앗의 큰 열매를 얻어 깊은 감사를 드리는 은혜를 입었다.
강신경 원로목사님-당신은 이 땅의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가꾸고 보살피기 위해 당신은 강목사를 정원사로 불러 쓰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곧 보육원이었고, 모자원이었으며, 노인 복지시설이었고, 각종 학교의 설립이었다.
강목사는 한 평생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진력을 다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도구로 충성을 다 하셨다.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신념아래 평생에 학교 하나를 세우는 것도 보통사람은 언감생심인데 그는 스쿨킹 답게 무려 10개가 넘는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교회를 세워서 인간 구원으로 일평생을 살아오신 강목사의 교육업적은 후손들이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교회 개척과 선교, 한 평생을 하나님의 이웃 이었다
교회 개척과 교육 사업에 매진하던 강목사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금오리교회’를 시작으로 ‘안흥교회’에 이어 연천군 전곡에 ‘늘목리교회’를 세웠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신흥교회 개척과 서울 상월곡 교회를 개척하여 활기차게 지역주민을 위해 구원의 방주를 세웠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영원한 전도사를 자임하였다.
일생 사회복지사업에 바쳐온 강신경 목사는 빠른 고령화 속도로 도시화, 산업화, 현상에 편승하여 핵가족화와 여성 인력의 사회 진울 등으로 노인들의 가족 내 부양 능력이 두드러지게 약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강목사는 고양시원당종합사회복지관, 신흥간병요양원, 신흥복지재단 신망애복지원을 설립하여 기독교 사랑을 바탕으로 노인들의 신체적, 정서적 안정과 함께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일상생활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그 자녀와 가족들이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에 전념하도록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자
한국전쟁 직후 군목시절부터 시작한 개척교회만 15군데를 세웠고 학교법인과 사회복지법인 등 총 5개의 법인을 세웠다.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 기독교정신에 뿌리를 두고,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학생들을 배출해 내자는 것이 강신경목사의 교육적 신념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뜨거운 열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는 지금도 붉은 심지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새벽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저 천국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말씀대로 강신경 목사님의 목회철학과 교육철학 그리고 나눔과 배품의 섬김 철학이 이러한 나눔과 교육혜택을 받고 있는 아이들, 청소년 그리고 젊은 청년들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으로 이러한 모든 업적을 쌓았으리라 생각을 했다. 늘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 인간중심의 사랑실천은 강신경 원로목사님이 살아오신 발자취 따라 “여호와 이래” 곳곳마다 찬양과 찬미가 넘칠 것이다. -박동혁/윤금아 -